서론 - 니체의 철학 개요
프리드리히 니체는 19세기 독일에서 태어난 철학자이다. 그는 스스로를 심리학자, 예술가적 영혼,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자칭했다. 그의 사상을 단적으로 요약하자면 다음의 몇 가지 키워드로 나타낼 수 있다. 무신론, 우상의 해체, 운명에 대한 사랑, 초인. 이것들은 니체의 사상을 이해하는 흐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이것들의 의미를 뜯어보며 독자로 하여금 니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나아가 니체 이후에 필자가 새로 세워야 한다고 믿는 지점을 소개할 것이다. 다만 필자는 전공자가 아니며, 그저 필자의 얕은 이해를 바탕으로 서술하기 때문에 부정확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본론 1 - ’신은 죽었다(Gott ist tot)‘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서의 주장을 단적으로 말하자면 ‘신’이라는 존재는 도덕적, 권력적 기원에서 발생했다고 본다. 즉, 니체는 무신론자이며, 특히 기독교적 신앙 체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니체는 기독교의 신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그들이 덕목이라고 주장하는 금욕주의나 신에 대한 숭배 자체를 부정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종교 자체에 부정적인 입장은 아니었는데, 그의 저작을 보면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와 같은 신들에 관련된 표현을 종종 찾아볼 수 있으며, 종교라는 존재 자체가 기여하는 심리적, 문화적 이점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즐거운 학문』에서 나온 ‘신은 죽었다(Gott ist tot)‘라는 표현 자체가 신을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신이 죽었다는 말은, 애초에 신은 없었으며, 더 이상 신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게 된 인간 사회를 뜻하는 말이다. 니체는 이러한 절대적 진리의 부재로 인한 인간의 혼란, 정신적 지주의 부재와 허무주의를 위기적으로 인식하고 극복하고자 하였다.
본론 2 - ’우상‘이란 무엇인가.
니체가 말하는 우상이란 단순히 종교적 의미의 신이나 조각 따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단순히 옳다고 믿는 모든 것이 사실 타인의 입김으로 형성된 가짜가 아닌가 하는 의심에서 출발한다. 니체에게 우상이란 도덕, 신앙, 가치관, 과학 이론 따위의 우리가 옳다고 믿고, 믿어온 그 모든 것을 뜻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것들을 우상으로 규정하고, 망치를 들고 부수고 해체해야 할 것들로 보았다.
이 지점에서 ’그렇다면 니체는 반도덕주의자인가?‘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니체는 지금까지 행해져 온 윤리적인 일들은 대체로 앞으로도 행해져야 하고, 피해져 온 비윤리적인 일들은 대체로 앞으로도 일어나서는 안될 것으로 보았다. 다만 그 기준이 지금까지 우리가 의심 없이 믿어온 도덕이 아닌 새로이 세워진 기준 위에서여야 한다고 설명한다. 니체에게 도덕이란, 또 우상이란, 단순한 해체의 대상이 아닌 해체와 재조립의 대상이었다.
니체는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우상은 신처럼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자신 안에 존재하며, 망치가 향해야 할 첫 방향은 자신의 심장이라고 보았다. 즉, 다른 외부의 진리를 의심하기 이전에 스스로를 의심하고, 다시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의 사상은 단순히 파괴적인 기존의 것들을 해체하려는 사상이 아닌 의심에서 벗어난 모든 진리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을 다시 의심하고 진실로 다시 세우고자 하는 사상이다.
본론 3 -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 아모르파티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운명을 즐기라는 낙관주의나 쾌락주의적인 말이 아니다. 인생의 모든 고통을 끌어안고, 그 모든 것을 사랑하라는 비극적 결심이다. 자신이 겪어온, 그리고 겪을 모든 것들, 고통, 상실, 절망, 실수를 포함하여 자신의 삶을 다시 살아내라는 물음에 직면했을 때, 또 그것을 영원히 반복하라는 말에 직면했을 때 단호히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용기의 선언이다. 영원회귀라는 시험 앞에서도 자신의 삶을 긍정하려는 의지, 그것이 진정한 운명에 대한 사랑이요, 아모르파티인 것이다.
니체는 신의 존재를 긍정하지는 않지만, 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춤을 추는 자의 형상일 것이라고 말한다. 절대적 진리의 부재 앞에 삶의 의미를 잃은 인류에게 니체는 스스로 삶에 의미를 새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예술가적 태도이며, 삶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새기는 것이다. 인생은 한 편의 덧없는 비극이지만, 그 비극 속에서도 춤을 추는 것이 스스로에게 신이 된 인간, 곧 초인이라고 본 것이다.
본론 4 - ‘초인(Übermensch)‘
그렇다면 ’초인(Übermensch)‘은 어떤 의미인가.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인간의 세 형상을 제시한다. 낙타-사자-아이. 이 세 형상을 통해 인간은 짐승도, 신도 아닌 과정의 존재라는 이야기를 한다.
먼저 낙타란, 짐을 짊어지는 자이다. 그 짐은 지식, 기존의 진리이다. 우상을 두드리려는 자, 우상에 대해 알아야 하기에, 낙타는 스스로 짊어질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짐을 바라며 계속해서 짊어진다. 그러나 곧 낙타는 사자가 된다.
사자는 ’나는 원하지 않는다!‘라고 소리칠 수 있는 자이다. 사자는 기존에 만들어져 있던 모든 진리, 곧 우상을 부정하며 그것을 파괴하는 형상이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기존의 진리를 부정한다. 그러나 아직 스스로의 진리를 세울 정도는 아니다.
마지막으로는 아이가 되어, 모든 것을 놀잇감으로 보며 그저 긍정한다. 아이는 모래성을 쌓으며 자신만의 신전을 세우고, 즐거워하기도 하며, 이내 모래성을 무너뜨리며 즐거워하기도 한다. 이것은 삶을 하나의 놀이로 보고 즐기며, 진리를 세우고 이내 다시 의심하며 해체하는 초인에 가까운 형상이다.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니체에게 삶은 완성이 아닌 과정이다. 단지 세우고 끝나는 것이 아닌, 끝없이 새기는 것, 영원히 완성을 미루며 영원히 진화하는 것이 진정 인간이 스스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본론 5 - 니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와 한계
결국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타율적 가치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기준과 의미로 인생을 살아내라는 것이다. 타율적 가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 창조를 이루는 자, 그 빈자리에 스스로의 가치를 새기는 자를 초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니체 철학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범위가 철저히 내부적인 자기 창조의 철학이므로 그 초인적 운동이 자기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한계 역시 존재한다. 자기 창조의 의미를 타자와 어떻게 나누는가나 다른 생에 의미를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니체는 침묵한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서는 니체 이후의 철학이 필요하다.
결론 - 니체 이후에 필자가 세우고자 하는 철학
니체는 스스로의 광기라는 불길을 글로써 통제하여 불꽃을 남겼으나 결국 말년에는 스스로의 광기에 불타며 생을 마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니체 이후에 세우고자 하는 철학은, 불꽃의 철학이다.
니체는 타인을 먼저 돌보기보다도, 스스로의 여유를 채워 흘러넘치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그의 저작들로 하여금 질문이라는 불씨를 내게 넘겨주었다. 물론 스스로를 먼저 채우라는 것은 옳은 말이지만, 그의 철학은 결국 스스로가 아이가 되고 초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발 나아가 다른 이에게 불씨를 넘기는 불꽃이 되고자 한다. 다른 이의 삶에 울림을 줄 수 있는 질문을 찾아내고 싶다. 빛나고자 타오르는 것이 아닌 밝히고자 타오르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설교하지 않는다. 이것은 침묵의 철학이며, 그저 조용히 내가 있던 자리에 불씨를 내려놓는 것이다. 언젠가 그것에 다가가고자 하는 자만이 스스로의 의지대로 불꽃을 이어받아 타오를 것이다. 나는 니체가 말한 것처럼 영원히 스스로를 새기고 다시 부수며, 그 불꽃을 영원히 피워내고 또 꺼트리며 내 다음 차례를 기다릴 것이다.
나는 아직 낙타이기에 불꽃을 피워낼 능력은 없다. 그러므로 나는 더 무거운 것을 짊어질 것이다. 철학, 문학, 과학, 외국어, 타인의 시선까지. 철학과 문학은 나의 사상을 확장해 주고, 과학은 기존의 진리를 알려주며, 외국어는 새로운 관점으로 기존의 진리를 의심하게 해주는 도구가 될 것이고, 타인의 시선마저 짊어졌다는 것은 내가 기존의 사회에서 인정받았다는 뜻이므로 곧이어 사자가 되어 모든 진리를 의심할 자격이 될 것이다. 언젠가 아이가 되고 불꽃이 되어 다음 차례에게 건넬 성화를 피워낼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나아가야만 한다. 이것이 내가 덧없는 삶에 새긴 나의 의미이다. 혹시 니체가 그 순간의 나를 보게 된다면 이런 말을 남기지 않을까.
“이 불꽃을 보라(Ecce ignis).”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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